최초로 "외환위기" 언급·대통령 직보한 인물이 있다

▲ 영화배우 김혜수가 '국가부도의 날' 시사회에 참석한 모습. /사진=뉴시스.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현재 상영 중인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핵심 역할을 맡은 배우는 김혜수다.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을 맡은 여성으로, 채무불이행(디폴트) 위기를 가장 먼저 감지했다. 위기를 정부 핵심에 전달하려고 고군분투하는 ‘미완의 영웅’이다.

영화 제작자는 서두에서 1997년 외환위기를 배경으로 했으나 스토리나 등장인물은 사실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1997년의 실제 한국은행에는 김혜수가 맡은 한시현 팀장처럼 맹활약할 수 있는 위치의 여성이 사실상 전무했다. 영화의 극적 효과를 위해 여성 배역으로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한은의 팀장이 아랫사람들에게 경어가 아닌 반말을 쓰는 것도 한국은행의 전통적인 분위기에서는 극히 찾기 힘든 경우다.

그럼에도 당시에 누군가는 실제로 김혜수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란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실제로도 그런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전쟁 이래 최대 국난을 그나마 헤쳐 나온 것이다.

한은 내에서 ‘국가부도’ 즉 디폴트를 의미하는 외환위기가 가장 처음 언급된 것은 영화 속의 11월 초가 아니라 훨씬 이전인 3월초다. 한보부도 사태가 터진 직후다.

당시 최연종 부총재는 집무실로 핵심부장(지금의 국장)들을 불러 모았다. 최 부총재는 한은 사람들에게 ‘역대급’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한보위기가 지금까지 다른 위기와 차원이 다르다고 체감한 그는 국장들에게 “야 겁난다!”라고 일갈하고 즉시 대응방안을 들고 올 것을 지시했다. 이 때는 한은이 은행감독원을 산하에 두고 있을 때다.

다음 회의 때, 정규영 국제부장이 들고 온 보고서에 ‘외환위기’가 등장했다. 멕시코와 태국 등 외국에서나 벌어지는 일로 여긴 단어가 국내보고서에 등장할 만큼 회의의 충격은 컸다.

경각심이 큰 만큼 한보사태 수습에 대해 국가적인 대응노력이 집중돼 그럭저럭 위기확산을 막은 듯 싶었다. 그러나 기아자동차 부도위기가 연이어 발생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한보 부도에는 국내은행들만 물렸지만 기아부도에는 외국계은행들도 부실채권을 끌어안게 됐다. 이는 국제시장에서 한보 때와 전혀 차원이 다른 더 큰 위기를 의미했다. 1980년대 이후 급성장한 한보와 달리 기아는 한국의 고도성장을 상징하는 ‘한강의 기적’에 해당하는 재벌의 하나였다. 기아부도 위기마저 겹치자 정책당국이 더 이상 대응하기 힘든 결정타를 맞고 말았다.

정규영 부장은 한동안 해외근무를 하다 2001년 정책기획국장으로 핵심요직에 복귀했다. 이후 한은 부총재보와 서울외국환중개사장을 지냈다.

대통령에게 위기를 직보한 것은 당시 청와대에서 근무한 재무관료 출신으로 전해지고 있다.

말하자면, 김혜수의 영화 속 역할에는 정규영 부장과 이 재무관료의 역할이 섞여있다. 영화에는 선악구도가 필수여서 재정부 차관이라는 인물이 악역을 도맡고 있다.

김혜수의 역할에는 이들 말고도 또 다른 실제인물들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현재 영화가 상영 중이므로 이 영화를 보려는 영화팬들을 위해 더 이상의 언급은 종영 뒤로 미룬다.

사족으로, 원화환율 800원 선이 뚫린 것은 1997년이 아니라 이미 1996년 중반이었음을 덧붙인다. 이 또한 영화 속에서 위기의 극적효과를 위한 각색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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