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산분리 완화를 못 믿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은산분리 완화에 대한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집권당 인사들이 내놓는 얘기들을 듣고 있으면 오히려 걱정이 더 깊어진다. 과연 금융정책에 대한 철학이 무엇인지라는 의문까지 들게 된다.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20일 페이스북을 통해 “상위 4개 은행이 시장의 80%를 점유하고 있다”며 “독과점의 고인물 같은 상황에서 경쟁이 없다보니 새로운 상품개발이나 기술혁신 없이도 편하게 얻는 영업이익만 연간 2조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그는 “금융에도 혁신이 필요하다”며 인터넷전문은행이 기존 은행의 경쟁을 촉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4개 은행의 독과점을 초래하도록 30여개나 되는 은행을 대폭 줄인 당사자는 과연 누구였는지를 홍영표 원내대표에게 묻고자 한다.
 

▲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오른쪽)가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와 함께 21일 서울역에서 추석 명절 귀성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1997년 외환위기 이전 시중은행은 34개나 됐다. 이 가운데 부실한 은행들을 대거 정리한 것은 위기 직후 집권한 김대중 대통령의 민주당 정부다. 당시 당명은 새정치국민회의였지만, 법리로나 현실로나 명백히 오늘날 민주당 정부와 같은 정권이다.

부실한 은행을 줄인 것을 가지고 홍영표 원내대표 발언을 꼬집을 수는 없다. 부실청산과 독과점 해소는 모두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에서의 금융정책은 부실한 은행만 줄인 것이 아니다. 우량한 은행도 이른바 ‘세계 100대’은행에 해당하는 강자를 만들겠다고 합병을 밀어붙였다.

당시만 해도 후발은행으로 덩치가 별로 크지 않았던 신한은행, 하나은행은 덩치 큰 우량은행인 국민은행, 주택은행을 중심으로 한 합병에 끌려들어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무리 우량은행이라도 합병을 하게 되면,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이 불가피하다. 국가가 금융을 잘못해 국난을 맞았을 때도 자신들은 은행을 건전하게 지켰는데 이제 와서 합병을 하고 일자리 희생을 감수하라니 은행원들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억울한 운명은 당시 최대 우량은행이었던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원들에게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부는 날 일산의 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있던 은행원들은 진압헬기가 일으키는 거센 바람 속에 텐트가 날아가며 강제해산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국내 금융사상 최대은행을 탄생시켰지만, 오늘날 결과가 과연 한국을 세계 금융시장의 강자로 끌어올렸는지를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다.

한 후발은행은 당시 은행원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시장을 발로 뛰어다니며 우량은행의 지위를 얻었다. 이 은행은 우여곡절 끝에 훨씬 역사가 깊은 다른 은행을 인수했다. 인수된 은행은 지체 높은 가문의 자제들이 많이 근무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귀한 집 자제들이 곱게만 일하다가 진짜 영업이 뭔지를 배울 것으로 기대가 됐었다. 그러나 합병 후 현실은 발로 만 뛰어다니던 은행의 채용에 고위층 청탁이 만연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역사상 가장 유서가 깊었던 은행은 ‘조상제한서’ 가운데 유일하게 스스로 힘으로 부실을 벗어날 수도 있다는 기대를 잠시 금융시장에 남겼었다. 그러나 이 은행의 최고경영자가 거듭 개인을 부각시키는 행보를 거듭한 것에 금융당국이 심히 심기가 불편해졌다. 훨씬 역사가 짧은 다른 은행에 인수되기 직전, 은행원들의 거센 항의를 대통령당선자 시절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주목했다. 그러나 금융당국자들이 마침내 노 대통령에게 적극 조언해 합병을 관철시켰다.

이런 식으로 해서 정리된 것이, 홍영표 원내대표가 말한 4대 은행의 독과점 체제다. 1997년 이후의 은행 통폐합은 모두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이뤄졌고, 유일한 예외가 하나은행의 외환은행 인수다.

은산분리 논란 과정에서 내내 의심을 떨칠 수 없는 것은 지금의 당국자들이 과연 자신들이 과거에 무슨 말을 했는지 의식이나 하느냐는 것이다.

금융지주회사 도입 때, 그리고 한 번도 예외 없이 은행원들의 거센 반발을 억누르며 밀어붙인 은행 통폐합 때마다 ‘선진금융’ ‘금융강국’ 같은 구호를 꺼내들었다.

홍영표 원내대표나 최종구 금융위원장 같은 당국자들은 이런 과거를 자신들과는 무관하다고 절대 강변해서는 안된다.

겉으로만 번지르르했던 구호들의 20년 지난 현주소가 어떤지를 생각해볼 때, 은산분리도 “이건 이러이러해서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현 당국자들의 발언을 어떻게 신뢰할까.

더욱이 자기들 손으로 4개 은행으로 정리한 은행판도를 이제 와서 독과점이라 다른 경쟁자가 필요하다고 강변하고 있다. 할 말을 잃게 되는 대목이다. ‘100대 은행(?)’ 4개 탄생을 위해 일자리를 잃었던 사람들이 명절때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심정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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