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과거회귀 정책, 2004년 노무현 정부 발목을 잡더니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어느 정권이나 몇 가지 정책에서 헛발질을 하게 마련이다. 헛발질이란 어휘로 뜻하고자 하는 것은 애초부터 탐욕스런 심보로 추진하는 사악한 정책이 아니라, 의도 자체는 좋았는데 결과가 전혀 딴판으로 나타나는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헛발질 정책이 한두 개 있다고 해서 정권 자체가 실패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른 좋은 정책으로 국가에 더욱 크게 기여할 수도 있고, 또 헛발질도 수습을 잘해 폐해를 최소화하면 크게 문제되지 않고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정부에서 헛발질에 제일 근접할 가능성이 높은 정책으로 지적되는 것은 최저임금 1만원이다. 대통령선거 공약으로 나올 때야 ‘선거 때니까 하는 얘기’로 여긴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것이 진짜 숫자 1만원을 목표로 추진되면서부터 많은 우려를 초래했다. 왜 9900원은 안되고 1만원이어야 하나, 왜 2021년이 아니고 2020년이어야 하나. ‘2020년 최저임금 1만원’이란 구호에 담긴 숫자가 마치 데드라인처럼 간주되는 행태를 많은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했다.

사실 최저임금이 얼마여야 하나라는 문제보다 더 앞서는 것이 정해진 최저임금은 잘 지켜지느냐는 문제다. 몇 년 전 국민적 스타가운데 한명인 가수 혜리가 광고를 통해 최저임금 이상의 아르바이트(알바) 시급을 꼭 받자고 했을 때 몇몇 중소상인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이 때 국민들은 법도 안 지키고 오히려 뻔뻔하게 화를 내는 상인들을 질타했다.

그랬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지금 최저임금 상승으로 고통 받는 상인들의 편으로 돌아섰다.

최저임금을 느닷없이 1만원으로 높이기보다, 노동현장에서 있는 법도 잘 안 지켜지는 폐습을 일소하는 일만 했어도 이전 정권보다 다르긴 다르다는 평가를 받기 충분했을 것이다.
 

▲ 류장수 최저임금위원장이 지난 14일 2019년 최저임금을 의결한 후 자리를 떠나고 있다. 사진=뉴시스.

 

몽상가들의 '선지자놀이'로 정책을 결정하는 건 아닌가

1만원 최저임금 단일사안보다 더 근본적으로 우려를 사고 있는 것은 현재 정책결정권자들 사이의 논의구조다.

지금 정권사람들은 이전 정권에 비해 사악한 탐욕을 앞세운다는 의심은 덜 받고 있다. 무슨 측근실세가 발호해서 멀쩡한 남의 기업을 내놓으라는 식의 행패 같은 것은 이제 지나간 시대 일이다. 뭇사람이 반대하는 땅 파는 일이나 해외 광산 개발도 억지로 밀어붙여 그 많은 수수료는 누구 손에 들어가는지 오리무중인 것 역시 지나간 시대 일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국민에게 피해를 주는 나쁜 정책은 탐욕에 의해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검증도 안 된 헛지식을 근거로 허황된 성과에 집착하는 것 역시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국민과 국가경제에 남긴다.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이력서에 몇 줄 튀는 경력을 가진 사람이 목소리도 커서 자기만의 몽상을 실제 정책으로 밀어붙이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잔뜩 부추긴 것이 최저임금 논란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사실 정권이 잘되고 안되고에도 별로 관심이 없다.

자기가 평생 몸담았던 학계나 노동계 같은 곳에 돌아갔을 때, “내가 이런 정책을 내 손으로 만든 사람이다”라고 자랑할 만한 트로피를 차지하는데 혈안이 돼 있을 뿐이다.

정권이 한 쪽 분야에서 무리를 하면, 민심의 저항이 커져서 다른 분야의 개혁을 유보하는 결과도 만들어낸다. 하지만 정권 전체의 성과보다 자기일신의 명성에만 집착하는 사람은 이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다.

이같은 헛똑똑이의 ‘말빨’에 희고 검은 것을 최고통치권자가 제대로 가려보지 못한다면, 그 통치권자를 지지했던 유권자들은 표를 잘못 행사한 것이 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 목표는 어려워졌다”고 사과를 한 것은 논란의 와중에 매우 다행스런 대국민메시지다.

새 목표가 9900원인지, 9000원인지보다 더 중요한 점은 어떻든 정부가 좌고우면하겠다는 겸손한 자세를 표방했다는 점이다. 자기만의 ‘선지자놀이’에 빠져 몽상을 정책으로 밀어붙이려던 사람들에게 제동을 걸겠다는 대통령의 의사표시이기 때문이다.

이런 비슷한 상황에서 ‘정면돌파’니 뭐니 하면서 발길 돌리기를 거부했던 정권들의 결말을 역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멈춘 것이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일부에서는 이제 역주행까지 걱정하고 있다.

심지어 은산분리, 즉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의 차단 원칙 완화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박정희-전두환-박근혜도 은산분리는 건드리지 않았다

은산분리는 한국 경제가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독재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통치를 겪는 와중에도 흔들리지 않은 원칙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이를 잠시 허문 적이 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이 같은 정파 내에서 정권을 승계했음에도 이를 즉시 바로 잡았다.

외국에서 쉽게 찾기 힘든 법이긴 하다. 그러나 외국의 기업풍토는 산업자본과 은행자본의 관계가 온갖 먼지를 뒤집어쓰는 근육과 위생을 철저히 지켜야 하는 혈액의 관계처럼 철저히 구분돼야 한다는 것이 헌법보다 더 철저한 관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법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은산분리가 지켜지고 있다.

이런 풍토가 아직도 빈약한 한국에서 막대한 자산규모를 가진 기업이 은행업의 신용팽창기능을 탐을 내 무작정 밀고 들어오려는 것을 막아주는 것은 역시 은산분리다. 사람들은 은산분리하면 이것 역시 대번 삼성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차단벽이 무너질 때 밀고 들어올 재벌은 삼성뿐만 아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무분별한 행위로 국민적 충격을 줬던 기업인들도 저마다 은행을 만들 수 있다. 이들이 영위하는 사업군을 볼 때 상당한 현실성을 갖는다.

정부가 주도해서 만든 인터넷은행이 제대로 영업을 못해 은산분리까지 넘보는 모양이다. 그런데 다른 인터넷은행은 작지만 상당히 알찬 성과를 낸다는 소식을 계속 전하고 있다.

무엇보다 은산분리를 당국자들이 언급하는 시점이 잘못됐다.

마치 2001년의 회귀경제를 보는 듯하다.

1997년 외환위기, 즉 ‘IMF 위기’ 극복의 에너지와 함께 ‘IT붐’이 꺼지면서 10% 가깝던 성장률이 가라앉기 시작했던 때다. 새로운 경제팀은  위기극복과정에서의 모든 개혁조치들을 급속도로 뒤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런다고 성장률이 다시 올라간 것도 아니었다. 1000 가깝던 주가는 다시 반토막이 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정책만 이전으로 후퇴했다. 이 때 후퇴했던 수많은 정책들이 2003~2004년 노무현 정부의 발목을 잡았다.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어도 2001~2002년 후퇴했던 정책부터 복원시키느라 노무현 정부의 경제팀은 무수한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그 와중에 5% 성장과 주가 2000을 그럭저럭 만들었지만, 재벌의 보험사 의결권 제한과 같은 법을 복원시킬 때마다 국회에서는 한바탕 싸움이 나고 장관들은 무수한 시간을 여의도 의사당에서 흘려보내야 했다.

경제문제는 급할 때마다 이것저것 허겁지겁 들이대는 사람보다 전체 시스템과 경제 각 부문을 체계적이고 유기적으로 볼 줄 아는 기술자들을 중용할 것을 절실히 권유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할 자리까지 선지자인척 하는 몽상가들이 차지한 듯 해서다.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