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을 두 달 앞두고도 금리 올려...한은 위상 확립 연임 총재 탄생으로 이어져

[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17년 전 오후, 지금보다는 부지런할 때여서 주말에 혼자 등산을 한다고 산에 오르고 있었다. 한국은행 공보실에 근무하고 있던 강성원 조사역의 전화를 받았다. 외환보유액이 사상 처음으로 1000억 달러를 넘어서 아침 9시에 기자회견을 한다는 전화였다.

이때를 지금까지 8월의 한여름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글을 쓰기 위해 검색을 해보니 기자회견을 한 날이 9월17일이다. 기억의 교란이란 것이 이렇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기억력 좋다는 말을 많이 듣지만, 글을 쓸 때는 반드시 확인을 해야 하는 이유다.

산속에서 생각해보니 왜 그 시간에 기자회견을 하는지 감이 왔다. 외환시장이 열리기 전에 기자회견을 하려는 것이다. 그 때 외환시장 개장은 은행 업무개시와 마찬가지로 아침 9시30분이었다.

미국에서 9.11 테러가 발생한 여파로 외환시장도 뒤숭숭했다. 환율이 12일 1286.1 원, 13일 1290.6 원, 14일 1296.3 원으로 상승 추세를 보이는 가운데 주말을 맞았었다.

이런 상황에서 외환보유액이 1000억 달러를 넘었다는 사실을 과시함으로써, 투기적 달러 매수 세력이 외환시장을 교란하지 못하게 하려는 기자회견이었다.

한은 기자실로 출근해보니, 과연 이런 목적에 걸맞게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가 직접 발표에 나섰다.

그 해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1997년 외환위기, 즉 ‘IMF 위기’ 때 빌려온 차입금을 모두 상환하는 서류에 서명할 때처럼 전철환 총재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기자회견에 나섰다.

발표만 전적으로 믿고 쓰는 건 기자의 도리를 저버리는 것이니 내용을 이리저리 뒤집어서라도 질문을 해야만 했다. 질문시간 놓쳐서 뒤늦게 바쁜 실무자들 괴롭힐 바엔, 생각나는 것은 일단 물어보자는 자세가 때로는 기자를 위험 속으로 유인하기도 한다.

한은이 발표한 외환보유액은 1000억3900만 달러였다.

“이제부터는 한국은행이 외환보유액 1000억 달러를 계속 지켜야 할 임무도 생겼기 때문에, 외환시장에 개입할 수 있는 돈이 3900만 달러 밖에 없다는 의견도 있는데요?”

질문할 때 전철환 총재 표정에 가득했던 웃음기는 입 언저리에만 간신히 남아있고 눈초리는 이미 쌀쌀해 졌던 것이 기억난다.

“고렇게 쓰면 오보 중의 오보지!”

다른 기자들이 전부 폭소가 터진 틈을 타서 저절로 질문이 마무리됐다. 아니었으면 전 총재는 더욱 사정없이 쏘아붙였을 기세였다.

그해 한국은행은 연 초부터 뚜렷한 금리인하 기조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국처럼 정부와 기업 때문에 금리가 올라가기보다 내려가기 쉬운 나라에서 기자의 논조는 금리인하에 비판적일 필요도 있다는 생각으로 1년 내내 기사를 썼다. 그 결과 친절한 교수님 같았던 전 총재가 아주 싸늘하게 돌변해 있던 무렵이다.
 

▲ 고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


전철환 총재는 금리를 올리든 내리든 본인의 소신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로도 금융통화위원회 회의 정황이 그랬다.

2000년 9월, 확실히 금리인상을 추진했지만 관료 출신 금통위원들 설득이 필요해 한 달을 늦췄을 뿐이다.

2001년 7월 인하는 정부 압력도 아니고, 오히려 전 총재가 의지를 가지고 다른 금통위원들 반대 속에 4대3으로 관철한 금리인하다. 오전에 예정됐던 기자회견도 1시 이후로 미룰 정도로 격론이 벌어졌던 이 회의에서는 특이하게도 관료출신 금통위원들이 인하를 강하게 반대한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인하 때보다도 당연히 금리인상 때 소신은 더욱 강력했다. 한국의 현실에서는 그래야만 여러 관련기관의 이해 속에 금리인상이 가능해진다.

2000년 2월의 금리인상은 특히 4월 총선을 두 달 앞두고 이뤄진 것으로 지금도 거론되고 있다. 일부 정권에서 집권당 대표뿐만 아니라 대통령까지 통화정책에 간섭을 한 사례에 비춰보면 이 때 금리인상은 타당성 여부를 떠나 그 과정 자체가 어마어마하다. 이렇게까지 정치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한국은행 정책 사례는 근년 내 다시 보기 어려울 듯하다.

하지만 후일담에 따르면, 이 금리인상이 전철환 총재 일신상 최대 위기를 가져왔다. 4월 총선에서 의외의 패배를 당한 집권당에서 화풀이 대상으로 전 총재를 지목했던 것이다.

그러나 ‘IMF 위기’ 극복 과정에서 강조된 금융원칙의 확립이란 명분 덕택에 전 총재는 위기를 넘겼다. 1998~2002년 4년의 임기를 완수한 것은 한은 역사에서 보기 드문 사례다. 이전 시대 임기를 완료한 총재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몇몇 총재의 임기 완료는 오히려 한은 독립을 희생한 때문이란 비판도 나왔다.

이와 달리, 전 총재의 임기 완수는 시장의 힘, 그리고 본인의 업적과 소신 덕택으로 평가된다. 그것이 이후 모든 총재에게 적용돼 3명의 총재가 임기를 완료했고, 지금의 이주열 총재는 한 차례 임기 완료 후 연임하기에 이르렀다.

여태까지 의심의 여지없는 역대 최고 한국은행 총재인 고 전철환 총재의 14주기가 18일이다.

해마다 이날이면 독자들에게 전하는 글이니 이번 글에서는 그의 ‘안한다면 안하는 소신’이 어떻게 이 나라 경제를 살렸고, 그의 몸가짐이 타계한지 14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왜 유난히 빛나는지는 앞선 글들의 링크로 대신하고자 한다.

기자는 해마다 이날이 되면 똑같은 글을 또 쓴다. 아직도 솔뫼 전철환 총재라는 이름이 생소한 독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의 관점에서는 한은 출신도 아니고 여러 명 전임 총재 중의 한 사람일뿐인지도 모르겠다.

마땅히 기억돼야 할 분이 제 자리에 서 있지 못하다면, 그 분의 현장을 지켜봤던 기자가 그때의 일을 두고두고 전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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