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에서 우연히 찾은 외국금융기관 P사의 실체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53] 반기로 전 파인아시아자산운용 대표는 원래 한국 금융공학의 선구자다.

외환위기가 발생하던 1997년 초, 그는 산업은행 외화자금부에 신설된 금융공학팀의 초대 팀장을 맡았다. 당시 직급은 부부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은행권의 현실적 제약 때문에 금융공학 업무뿐만 아니라, 외화자금부의 통상적인 자금거래 업무도 맡아야 했다.

반 전 대표는 금융공학팀장에 부임하자마자, 밤 12시전에는 퇴근을 할 수 없는 상황을 깨달았다. 산업은행 차원을 넘어 한국 금융권 전체의 사정 때문이었다.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IMF 위기’가 발생하기까지는 아직 9개월 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미 상당히 심각한 상황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심야의 외화자금부 딜링룸에서 절감했다.

그의 발목을 잡는 일은 단기자금 창구인 머니마켓에서 발생했다.

산업은행이 돈을 못 구한 건 아닌데, 다른 시중은행들의 부족한 외화자금을 메우는 일을 하다보니 머니마켓 라인이 그날 업무를 제시간에 마감할 수 없었다. 시중은행들에선 이때부터 외화자금 조달이 막히기 시작했다. 한 해전인 1996년만 해도 전혀 상상도 못할 상황이었다.

아시아 시장에서 필요한 돈을 못 구하면 유럽, 런던, 뉴욕시장의 순서로 해외시장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끝내 부족한 외화는 산업은행의 당시 결제은행인 체이스 은행이나 씨티은행에서 하루짜리 자금으로 해결했다. 일단 그날 하루는 넘기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보낸 것이다.

당시 머니마켓 거래는 대부분 3개월 만기였다. 하루짜리 자금은 자금 수급 예측을 잘못해 돈이 부족하거나, 운용규모를 크게 초과하는 많은 자금이 갑자기 들어왔을 때 하는 거래다. 어쩌다 하루도 아니고 매일 하루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일이 반복되는 것은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했다.

시중은행들의 외화자금난은 종금사로 인해 비롯된 것이었다. 1995~1996년 사이 20여개 넘는 종금사가 갑자기 늘어나 전체 종금사가 30개에 달하면서 이들의 과잉경쟁이 시작됐다.

해외자금 조달능력이 없는 종금사들은 갖은 수단을 동원해 시중은행을 통해 자신들이 필요한 외화를 조달하려고 했다. 종금사의 외화자금 압박이 은행권으로 전가됐던 것이다.
 

▲ 시중은행 딜링룸의 모습. /사진=뉴시스.


7월 들어서는 태국의 바트가치가 절반으로 급락하면서 ‘한국은 괜찮으냐’는 우려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무렵, 야근을 하는 그에게 대리 한 사람이 다가왔다. 이 대리는 파이스턴이코노믹 리뷰라는 지금은 사라진 외신기사를 가져왔다.

홍콩의 금융회사인 P사에 관한 것이었다. 이 회사가 일반적인 금융회사들과 달리 상당히 공격적인 거래를 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외신에 실린 이야기는 더욱 생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금융회사라는 곳이 태국에서는 새우 양식을 하는가하면, 베트남에서는 세금에 관한 법적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는 내용이었다.

반 전 대표는 이 대리가 가져온 기사 내용이 심각하다고 판단했다. 특히 P사가 당시 산업은행과 제법 금융거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산업은행 외화자금부는 당시 원달러스왑을 처음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화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통화가 아니어서 원화가치에 대한 판단근거가 없었다. 그에 따라 산업은행과 원달러스왑거래를 하려는 해외 금융기관이 나타나지 않았다.

유독 P사만 상당히 적극적으로 산업은행의 거래 제의에 응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 전 대표는 아무리 다른 거래 상대를 못 찾더라도, 새우 양식도 하고 세금 문제도 일으킨다고 보도가 된 이런 곳과는 거래를 중단하는 곳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거래가 중단되자 P사의 홍콩 본사에서 바로 찾아왔다.

반 전 대표는 이들에게 정확한 이유 대신 “내부 사정 때문에 그렇게 됐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런 다음 그는 산업은행의 해외지점과 현지법인에 연락을 해서 “우리는 P사와 거래를 중단했으니 참고하라”고 알렸다. 부부장 직급으로 직무가 금융공학팀장인 그로서 취할 수 있는 최적의 경계조치였다.

그러나 P사가 1998년 투자실패로 파산했을 때, 현지법인 한 곳이 P사와 큰 거래를 했다가 손해를 보게 된 사실이 드러났다.

이 또한 알고 보니 국내 종금사의 외화차입에 대한 보증거래였던 것이다.

반 전 대표는 당시 정부의 ‘세계화’ 구호 속에 국제금융식견이 부족한 사람들이 해외 금융업무에 투입되는 사례도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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