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의 죄를 대신 짊어진 스무살 짧은 생애와 덕종어보

[초이스경제 장경순 만필] 덕종어보의 진위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1924년에 분실돼 왕실이 다시 만든 것이니, 정식 어보에 틀림없다는 것이 문화재 당국의 설명이지만, 다시 만든 담당자가 하필 매국노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가 아니냐는 시비가 발생했다. 그러나 당국은 이항구가 분실과 관련해 징계를 받았고 다시 만든 사람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덕종(德宗)은 조선 왕조에서 실제로 왕위에 올랐던 사람은 아니다. 사후 임금의 예우를 받았기 때문에 조, 종의 묘호로 덕종이라 불리고 있다. ‘태정태세문단수’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만필자는 가당치도 않은 세조의 묘호를 거부하고 성군 세종이 손수 지으신 수양대군이라는 군호를 사용한다.)

조선의 덕종은 정식 임금이 아니지만, 고려의 덕종은 아홉 번째 왕으로 등극했다. 두 왕조 덕종의 생애는 모두 젊어서 세상을 떠났다. 조선의 덕종은 세자이던 20세에, 고려의 덕종은 즉위 3년 4개월 만에 18세 춘추로 생을 마쳤다.

‘덕(德)’이라는 묘호는 두 사람이 대단히 인덕이 높았다는 평가를 담고 있다. 고려 덕종의 경우, 후대의 대학자인 이제현은 “부모 상을 당하여 자식으로서 효를 다하였고, 정치를 함에 있어 아버지의 하던 일을 고치지 않았으며, 원로를 신임하여 조정에는 서로 기만하는 일이 없었다. 그의 시호에 덕자를 붙인 것은 당연하다”고 평했다. 덕종의 아버지는 거란의 세 차례 침략을 격퇴한 현종이다.

조선의 덕종은 수양대군의 아들이다. 덕종 본인보다는 부인인 소혜왕후 한씨가 더 유명하다. 소혜왕후는 인수대비라는 칭호로 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했다.
 

▲ 조선 덕종어보. /사진=뉴시스.


수양대군이 단종을 시해하자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의 원혼이 세자이던 덕종의 목숨을 빼앗아 원수를 갚았다는 민간의 얘기가 전하고 있다.

이 전설 때문에 덕종은 아비의 죄를 대신 짊어진 비운의 세자로 알려졌다.

짧은 생애를 마쳤지만, 그를 어떻게 예우하느냐가 한동안 조선 조정의 논란거리였다. 아들인 성종이 즉위하면서 의경세자에서 회간왕으로 지위가 격상됐지만, 그를 부묘(祔廟. 종묘에 왕으로 신위를 모시는 일)하느냐 마느냐가 그의 사후 18년이 될 때까지 지속됐다. 정창손, 정인지, 홍귀달 등 쟁쟁한 선대의 공신들이 불가함을 주장했다.

마침내 성종 6년인 1475년, 왕이 젊어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결단을 내리고 밀어붙였다.

의정부와 육조의 참판 이상. 즉 차관 이상의 모든 고관들이 모여 장종(章宗)·효종(孝宗)·안종(安宗)으로 묘호를 올렸지만 아버지를 그리는 왕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덕종(德宗)·순종(順宗)·헌종(獻宗)으로 올리니 드디어 왕이 덕종으로 정했다.

아비 수양대군이 뿌린 피냄새가 가시지 않은 대궐에서 짧은 생애를 마치고, 아들 성종의 어려서 여읜 아버지 그리는 마음이 더해져 생긴 묘호가 덕종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덕종의 어보가 또 순탄치 않은 일들을 겪으면서 오늘날에도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수 백 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분에게는 전혀 무관한 인간세상의 풍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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