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감 몰아주기 규제... 단속과 근절보다 "합리적 방법 찾자" 강조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지금부터 9년 전, 공정거래위원장이 재계 관계자와 만나는 자리에 특이하게 외제 승용차 한 대가 있었다.

당시 퇴임을 앞두고 있던 강철규 공정위원장이 마지막 당부를 위해 주요 재벌의 구조조정본부장을 초청했다. 재벌회장들 조차 장관들을 만나러 갈 때는 국산 차를 선호하던 풍조가 강할 때였다. 하물며 고위직이라지만 일개 임원인 사람이 무슨 배포로 아우디를 타고 왔는가 궁금했다.

참석자 가운데 비교적 젊은 편이었던 모 재벌 인사가 아직 국내 실정 몰랐던 것 아닐까 추측했지만 알고 보니 이학수 삼성그룹 구조조정 본부장이었다. 여전히 국내 제1, 제2 재벌간의 자존심이 결부된 현상으로 보였다. 강철규 위원장과 구조본부장들의 간담회가 끝난 뒤 이 차 주변은 미니 기자간담회장으로 돌변하게 된다.

강철규 위원장이 “최근 삼성에서 좋은 발표를 많이 해 (지배구조 개선에) 긍정적”이라고 평가하자 이학수 본부장이 위아래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면서 답례 겸 공감을 표시했다. 강 위원장이 “발표 내용에 순환출자 관련 내용이 없는 것은 미흡하다”고 하자 이 본부장의 고개는 움직임을 멈췄다가 “삼성이 투명성을 높여 진일보했다”는 칭찬에 다시 끄덕거림을 시작했다.

김상조 현 공정위원장은 강철규 당시 위원장에 비교하면 소액주주운동을 실천으로도 행했던 훨씬 더 강경한 인물로 재계에서는 보고 있다. 삼성전자 주주총회장에서 안전요원들에 의해 강제 축출된 적도 있다.
 

▲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23일 4대그룹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갖고 있다. 왼쪽부터 박정호 SK텔레콤 사장,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 김상조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 이동근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정진행 현대자동차 사장, 하현회 LG사장. /사진=뉴시스.


김 위원장이 23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4대그룹 관계자와 간담회를 가졌다.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 정진행 현대자동차 사장, 박정호 SK텔레콤 사장, 하현회 LG 사장이 참석했다.

한 시간에 걸친 이날 대화는 일감몰아주기와 같은 ‘뜨거운 감자’에 관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비교적 훈훈한 모습으로 마무리됐다.

김상조 위원장은 “오늘 정말 솔직하고 유익한 대화의 기회가 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특히 취재진에게 “기업과 관련된 대화 내용은 영업 기밀도 있기에 앞으로도 내용을 다 공개해가면서 만나기는 어렵다는 점 양해 부탁 드린다”고 당부했다.

기업들의 핵심 정보인 지분구조와 같은 정보는 누설될 경우 적대적 자본의 경영권 공격도 초래할 소지를 안고 있다. 재벌들은 정부의 시책에 협조하는 과정에서 이런 정보의 누설 가능성을 우려해 왔다.

권오현 부회장 또한 “위원장께서 해야 할 일을 말씀해 주셨는데 이해가 많이 됐고 타당하다고 생각했다”며 “이런 소통 기회가 처음인 것 같은데 앞으로도 자주 만나서 어려움이나 발전 방향을 토의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공감했다. 그는 “저자 직강을 들을 수 있어 감사했다”는 촌평도 덧붙였다. 김상조 위원장은 점차 삼성그룹과의 경색된 관계가 해소돼, 2013년에는 사장단 회의에 강연을 하기 위해 초청됐었다.

정진행 사장도 “명확하고 신중하게 정책을 펴시겠다고 해 앞으로 전혀 의구심을 가질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밝혔다.

일감 몰아주기는 편법 상속을 위해 공정거래를 해치고 억울한 다른 기업인의 피해를 유발하는 것으로 원칙으로 따지면, 대화와 타협 보다는 단속과 근절의 대상에 해당한다.

한편으로는 주요 국내기업들이 2세에서 3세 경영으로 전환되는 시점에 경영권의 향방과도 관련된 문제다. 재벌들은 공개적으로 말은 못하지만, 기업 안보를 위해 ‘나쁜 짓’을 할 수 밖에 없는 현실로 인식하고 있다.

김상조 위원장이 “즉각 근절하라”는 최후통첩이 아니라 “향후 개별적인 대화를 통해 좀 더 합리적이고 일관적인 정책을 시행하는 방법을 모색하겠다”고 밝힌 자체로 그가 더 이상 주총장에서 축출되던 소액주주 운동가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정부의 태세가 이와 같다면, 해당기업들의 상응하는 전향적 자세 또한 요구되고 있다. 지금까지 교훈에서, ‘재벌에 나긋나긋한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기다린다’는 태도는 재벌 자체에도 별로 득이 안됐기 때문이다. 편법 상속을 하기 위해 정권의 비선실세를 찾아다니다가 오히려 총수가 선대에서 겪어본 적 없는 혹독한 심판을 받고 있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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