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기원에서 서기로 넘어올 무렵의 아시아와 유럽에는 두 개의 거대 제국이 있었다. 중국의 한나라와 로마다.

두 나라에는 공통의 골칫거리가 있었다. 이민족과의 갈등이다.

로마는 초대 아우구스투스 황제로부터 ‘5현제 시대’의 절정기를 거치는 동안에도 변방에서는 이민족들과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아르미니우스, 부디카, 알라리크 1세 등 로마에 맞선 영웅들의 이름은 끊임없이 등장했다.

화려한 로마시대를 흠모하는 사람들은 로마를 무너뜨린 이민족들이 혐오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런데 당시 역사를 살펴보면, 먼저 시비를 건 것은 이민족들이 아닌 로마였다. 로마 황제들은 즉위 후 업적을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끊임없는 정복에 나섰다. 여기서 얻은 이민족 노예는 로마의 상류사회를 위한 필수요소였다.

황제는 승리가 필요했고 귀족들은 노예가 필요했다. 이런 로마의 속성으로 인해, 이민족들과의 평화는 논리적으로 성립불가였다.

영국에서 1세기 로마에 맞선 부디카의 저항은 이런 로마의 속성을 제대로 보여준다.

이케니족 여성인 부디카는 남편이 살아있을 때만 해도 부족할 것 없이 두 딸을 키우는 왕비였다. 남편인 왕은 생전 로마 점령군과 동맹관계를 유지했고 죽을 때 로마와 두 딸에게 왕국을 나눠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로마 점령군은 이를 무시하고 침략의 본성을 드러냈다. 남편 잃은 부디카를 매질했고 두 딸을 겁탈했다. 잔인무도하게 평지풍파를 일으킨 로마는 그 이상의 댓가를 치르게 된다.

부디카는 현지 부족들을 규합해 로마에 맞섰고 몇 차례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 과정에서 수 만 명 인구를 가진 식민도시 몇 군데가 시민들과 함께 완전히 파괴됐다. 끝내 로마군단에 패퇴해 목숨을 잃은 부디카는 오늘날 영국을 상징하는 인물로 남아있다.

게르만족의 아르미니우스 또한 비슷한 사정으로 로마에 맞서는 인생을 가게 됐다. 로마 총독의 무리한 금 요구와 식민정책이 아르미니우스를 게르만의 영웅으로 이끌었다.

로마의 이런 이민족 정책은 같은 시대 반대편 세계를 다스린 중국의 한나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것이다.

한나라의 고민은 이민족을 정복해 노예를 얻는 것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변방을 공격하는 이민족들로부터 중국인을 보호하는 것이 한나라의 고민이었다. 로마와 비교하면 공수가 바뀐 것이다.
 

▲ 중국 드라마 한무제에서 흉노족이 한나라 변방 요소를 습격하는 장면. /사진=한무제 화면캡쳐.


변방의 주민들만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한나라 황실도 고통 분담에 나서야 했다. 전한의 4대 황제인 효경황제는 흉노족 선우와 평화를 맺기 위해 친딸을 그에게 시집보내야 했다.

황녀를 선우의 여인으로 보내는 사례가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전에는 모두 형식적인 ‘황녀’를 보냈다. 궁인 가운데 한 여인을 황제의 양녀로 입양한 후 보내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효경황제 때 흉노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이걸 누그러뜨리는데 예전처럼 아무 여인이나 보내는 것은 황제의 성의가 부족한 것으로 간주됐다. 진짜 딸을 보내서 선우가 이를 왕비인 연지로 맞아들여야 양국 간 진정한 화친이 성립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천자가 전례 없이 친딸을 ‘오랑캐’에게 시집을 보내게 됐다. 이 여인이 30년의 평화를 가져와 훗날 남매인 한무제의 대원정을 준비할 시간을 벌어줬다고 한다. 또한 400년 후 삼국시대가 끝나고 5호16국 시대로 돌입할 때 낙양을 함락시킨 흉노족 유연이 유씨 성을 쓴 것은 이 때 한나라 황실이 흉노 선우의 외가가 된 때문이다.

한나라 뿐만 아니다. 당나라 송나라 등 후대 왕조들도 현실적으로 여의치 못하면 이민족들에게 조공품을 보냈고 효경제처럼 공주의 시집을 외교카드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민족들을 괴롭힌 로마와 달리, 중국은 이민족들에게 맞고 산 신세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다. 로마는 5세기 서로마제국의 멸망 후 유럽의 정상에서 사라졌다. 로마의 명맥이 오늘날 이탈리아로 얼마나 이어지고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중국은 이와 달리 한나라 때의 국체가 황실만 여러 차례 바뀌었을 뿐 그대로 이어져 그 문자와 철학·가치체제가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

중국이 진·한 시대 이후 영토를 넓혀간 과정은 선제 공격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이 침탈되는 과정을 통해서다. 이민족이 들어와 천자를 대신한 후에는 한족에 동화돼 이들의 원래 영역까지 중국에 통합됐다. 5호16국 시대, 몽골의 원나라, 만주족의 청나라 통치 기간이 끝날 때마다 중국의 영토가 늘어났다.

왜 이런 로마와 정반대 결과가 나왔는지, 이에 대한 해답을 선구적으로 깨달은 인물이 있다.

전한시대의 중항렬이다. 기원전 2세기 전한 3대 황제 효문제 때의 인물이다. 효문제는 딸을 시집보낸 효경제의 아버지다. 효문제 또한 종실 여인을 황녀라 해서 흉노에게 시집보냈는데 이 때 환관인 중항렬을 수행원으로 보냈다.

흉노 땅에 간 중항렬은 이후 흉노 선우를 섬기는 최고의 참모로 변신했다.

그는 선우에게 한나라가 흉노에게 보내오는 비단과 음식에 너무 탐닉하면 한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흉노의 인구는 한나라 하나의 군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흉노가 강한 것은 먹고 입는 것이 한나라와 다르기 때문”이라며 “만약 한나라 물자를 좋아해 이에 의지하면 한나라에서 소비하는 물자의 10분의 2를 소비하기도 전에 흉노는 모두 한나라에 귀속되고 말 것입니다”라고 간언했다.

중항렬은 이어 “한나라 비단과 무명 옷을 입고 풀과 가시밭 사이를 거닐어 그 옷이 다 찢어져 흉노의 가죽옷보다 못하다는 점을 보여주십시오. 한나라 음식이 흉노의 젖과 유제품보다 못하다는 것도 보여주십시오”라고 충고했다.

군사력이 아닌 경제력이 수 천 년 역사동안 무수한 이민족 속에서 대제국을 유지하는 비결이 될 것임을 중국의 변절자로 비난받은 중항렬이 암시하고 있다.

중국 사서에는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금언이 자주 등장하는데 중국의 이민족 정책이 바로 이 교훈을 그대로 입증하고 있다.

최근 중국이 ‘대국 굴기’라고 해서 눈에 띄게 공세적이고 팽창적인 행보를 보여준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중국이 강했던 이유와는 상당히 차이가 나는 모습이다.

미국의 사드 미사일로 인해 최근 수년간 급진전된 한중 우호가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 또한 역사를 살펴보면 아시아의 정세는 어떤 무기를 가지고 판가름 난 적이 없다는 것을 한국과 중국의 식자층은 잘 알고도 남을 일이다.

그럼에도 위정자들은 저마다 민심을 의식한 나머지 두 나라가 평행선만 달리고 있다. 저쪽의 통치자들이 알고는 있지만 차마 자기 국민들에게 직접 얘기하기 부담스런 것이 있다면, 그런 부담을 다른 사람이 덜어주는 쪽의 해결은 불가능할지, 옛 서적만 들척이는 서생에게 문득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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