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관객 끌어모으려다 보니"...현장 중시한 정책 쏟아내야

▲ 사진=뉴시스

[초이스경제 김용기 칼럼] 문화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므로 뮤지컬과 같은 공연자들을 많이 알고 지낸다. 이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밥 사고 술 살 때가 많다. 이들이 갑이고 내가 을이어서가 아니다.

이 사람들 형편 때문이다.

누구는 대학로 어디 극장에 8000만 원이 밀려있고, 또 누구는 다른 어디 극장에 4000만 원 밀려있다고 한다. 억대로 밀린 사람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토록 험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저마다 재능을 갖춘 예술인들이다.

공연을 할 때마다 번 돈은 먼저 공연 때 생긴 빚 갚는 데 쓰는데, 그조차 부족하다. 소위 ‘대박’이 터지지 않는 한 빚은 더욱 늘어난다.

이게 오늘날 문화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삶이다.

잘 나가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도 매번 다른 공연장 알아보느라 힘써달라고 부탁한다.

이런 환경이 무슨 문화 강국이고 문화 융성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 좀 하지 말라.

현장에 있는 제작자들이 죽으면 문화고 뭐고 없다. 내 공연장에서 공연을 한 사람들 중에도 경제적으로는 파산 상태인 사람들이 많다.

나는 돈 달라고 전화 한 통 안했다. 그나마 이 사람들이 없어지면 문화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대관료를 못 갚아 잠적했던 사람들은 10년이 지나면 다시 찾아온다. 돈을 갚으러 오는 것이 아니다.

10년 잠적 끝에 다시 용기를 내서 공연을 해보려 하니까 찾아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문화가 이어가는 생생한 모습은 이렇다.

관료들이 문화정책을 하는데 과연 이런 현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어렵게 행정고시를 붙은 고위 관료들이 두뇌가 우수한 분들이란 점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머리만으론 안된다. 문화 현장을 더 파고들어야 한다.

문화 정책을 하려면 제작자를 알아야 하고, 배우를 알아야 하고, 또 관객을 알아야 한다.

하나의 예가 소위 ‘삐끼’ 단속이다. 유흥가 호객꾼을 연상시키는 단어인데, 대학로 거리에서 관객을 끌어모으는 이들을 공연예술계에서 삐끼라고 한다.

표현이 점잖지 못하지만, 공연계에서는 이 삐끼들 조차 하는 역할이 있었다. 물론, 어감에서 풍기는 일부 보기 흉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일부 제작자들은 “오죽했으면 그런 사람들까지 동원해서 관객을 모으려고 하는지 속사정을 헤아려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어떻게 해서든 끌어모아오던 관객이 없어진다면 제작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소연이다. 문화도 살고 공연계도 살 수 있는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나마도 문화계는 당분간 좋은 정책 나오기가 더 어렵게 됐다고 한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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