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이 나라에 딱 한분, 다시 태어나기를 바란다면

기사승인 2015.06.21  15:05:39

공유
default_news_ad1

- 해마다 6월18일, 그의 기일에 회상하는 전철환 전 한국은행 총재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서울대학교 법학부 전종익 교수의 앞선 직장은 헌법재판소다. 사법시험 합격 후 1998년 이곳에 연구관으로 첫 직장을 얻었다. 부모님이 모두 대전에 계셨기 때문에 그는 서울에서 자취를 해야 했다.

그가 직장을 얻은 것과 함께 집안에는 또 하나의 경사가 찾아왔다. 충남대에 재직하던 아버지 전철환 교수가 한국은행 총재에 임명된 것이다. 경사이긴 하지만, 개국 이래 최대 경제위기 ‘IMF 사태’를 극복해야할 막중한 책임을 아버지가 짊어지게 됐다.

어떻든 전종익 연구관은 이제 학창시절부터의 고단한 자취생활을 청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게 됐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기대와 너무나 달랐다.

헌법재판소의 근무는 9시20분부터 시작했다. 남들보다는 다소 여유 있는 아침 시간을 가져왔던 전 연구관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서울 오시면서부터 이 여유는 사라지고 말았다.

전철환 총재가 출근하기 전, 반드시 아들 방에 들러서 전 연구관의 잠자리를 뒤흔들어 출근 태세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정부 기관장들이 아무리 늦어도 8시에 등청하지만, 거의 매일 이보다 한 두 시간 앞선 조찬 모임을 갖기 때문에 전종익 연구관의 아침이 어떠했을지 우리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국가 공무원의 자세가 이러면 안된다”고 호통 치며 아들 방으로 쳐들어온 전철환 총재는 출근 전 아들의 자는 모습을 용납하지 않았다.
 

   
▲ 고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의 재임시절 모습.

 

전철환 총재가 한은 출입기자들과 여담을 갖는 자리에서 자녀 교육의 철학을 강조한 것이 있다. 절대로 대학 졸업 후에는 한 푼도 도와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원도 포함해서다.

물론, 자녀가 학문에 소질이 있어서 공부 좀 하겠다고 우긴다면 예외일수는 있겠지만, 여기에 대해 전 총재는 촌철살인의 한 마디를 던졌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식이 공부한다고 하면 50까지도 키울 사람들입니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 완고한 방침이 절대 도전불가임을 알았는지, 그의 두 아들은 정말 학부 이상으로는 부모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는 인생을 선택했다. 전종익 교수의 형은 서울대 병원 의사다.

전북 익산에서 가진 것이라곤 친척들뿐인 농가에서 태어난 전철환 총재는 개혁적 경제학자인 ‘중경학파’로 분류됐다. 그 때문에 1980년 신군부 출범 때 다소 고초도 겪었다고 한다. 이를 보고 자란 두 아들은 어려서부터 아버지한테 대학교 학비 받는 것 이상을 꿈꾸지 않았던 모양이다.

‘학비 지원은 대학까지만’으로 칼로 무 자르듯 했을 뿐만 아니라, 전철환 총재는 전종익 교수의 재테크까지 심각한 손상을 입혔다.

전 교수는 월급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평소 관심이 있던 주식에 투자를 했다.

아버지가 어느 날, 두 아들을 호출해 엄중하게 명령했다. “오늘 이후로 주식을 단 한주도 사지 말며, 갖고 있는 주식은 단 한 주도 팔지 말라.” 기한은 2002년 3월말까지, 자신이 중앙은행 총재로 있는 4년 동안이었다. 행여 정책 과정에서 얻은 정보로 이익을 도모한다는 세간의 오해를 초래할 가족의 주식 매매를 엄금했던 것이다.

이 또한 고통은 전종익 교수의 몫이었다. 형은 주식투자를 안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명령에 전 교수의 계좌는 꽁꽁 묶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값이 떨어지는 주식이 생겼다. 이 주식은 놔둘수록 더욱 값이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견디다 못한 전 교수는 마침내 이 주식을 아버지 몰래 조금 내다 팔았다. 이 사실을 그는 아버지 돌아가신 1년 후 기자가 찾아간 자리에서 ‘자백’했다.

청렴에 관한 아버지 전철환 총재의 결벽증은 두 아들이 누구나 다 하는 인생 단 한번 치사스런 짓도 못하게 만들었다.

수년전, 인천의 모 교육감이 아들 결혼식 청첩장을 관내 교육기관에 무수히 살포해 엄청난 물의를 빚었다. 이 사람 뿐만이 아니다. 우리 주위에는 멀쩡하다가 결혼식만 되면 치사해지고 자신의 평생 처신에 단 한번 오점을 남기는 사람을 본다. 유독 결혼식에 이렇게 되는 이유는 한국사회 특유의 사돈집을 의식하는 허세 때문일 것이다. 특히 나를 갑으로 섬겨야 할 사람들을 비롯해 알고 지내는 선배동생들 협회, 친목회가 모두 결혼식에 출동해야 사돈어른이 내 자식을 우습게 못 볼 것이라 믿는 구태다.

이걸 좌시할 전철환 총재가 아니었다. 자식들 결혼식에 이런 꼴을 안보이려면 무엇보다 전철환 총재가 수장으로 있는 한국은행 사람들이 아무도 몰라야 했다. 철저한 비밀에 붙인 결과, 그의 두 아들 모두 ‘허세 금융인 한마당’과 전혀 거리가 먼 진정한 결혼식을 치렀다.

결혼식 때 하객이 너무 없지 않았냐고 묻자 전종익 교수는 “집안 어른들이 정말 많았다”고 회고했다.

전철환 총재가 스스로 몸가짐을 단속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장관급 정부기관장이 되면 본의와 달리 무수한 정치 풍랑에 휩쓸리기 마련이다.

특히 전철환 총재처럼 총선 두 달을 앞둔 시점을 아랑곳하지 않고 금리를 올린 인물이라면, 그리고 그 선거에서 여당이 부진했다면, 결코 그런 사람을 놔두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생리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한 때 중도해임의 위기를 가졌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일신에 생트집 잡을 것이 있어야 가능한 협잡이다. 이렇게 아들 결혼식에 비밀작전까지 불사하는 그에게 꼬투리 잡을 일도 없거니와, 무엇보다도 개국 이래 처음으로 중앙은행 총재의 카리스마를 처음 접하는 금융시장의 민심을 거스를 수 없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한국은행 총재의 임기 보장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 한국은행 옛 본점 건물은 전철환 총재 재임 중 화폐금융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사진=네이버지도.

 

세월이 갈수록 그 빈자리가 여전히 커져만 가는 한은 총재 카리스마는 전철환 총재의 청렴한 몸가짐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다. 금융업 종사자들은 이해에 밝은 사람들이다. 내가 손해 보게 생겼는데 인품이 뛰어나다해서 절대 존경하지 않는다.

이익만 안겨준다고 시장 카리스마가 생겨나지도 않는다. 이익 본 사람이 있으면 손해 본 사람이 반드시 생기는 게 시장원리다. 시장 카리스마는 설령 내가 손해를 봤더라도 공공의 금융체계는 절대 불평할 수 없이 공정하고 일관됐을 때 생겨난다. 이것을 우리 금융시장은 전철환 총재의 임기 동안 제대로 누렸다. 그의 취임 불과 몇 달 전 금융 붕괴로 국가부도 직전으로 몰리고 ‘금 모으기’ 운동을 벌였던 나라다.

전철환 충남대 교수는 중경학파라 해서 진보성향 학자로 알려졌지만, 한국은행 총재로서 그가 보여준 철학은 철저한 시장경제였다. 시장의 판단이 가장 옳다는 것이다. 그 압권이 바로 오늘날 우리 금융시장의 기둥으로 성장한 채권시장이다.

계기가 된 것은 1998년 9월 재정경제부(지금의 기획재정부)가 국고채 14조원을 시장 발행한 때다. 당초 정부는 이 물량을 한국은행이 우선 매입해 줄 것을 요구했다.

전철환 총재가 이를 거부했다. ‘안한다면 안하는’ 그의 완고한 성격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시장을 통해 발행하는 것이 국가와 금융시장 모두 큰 이익이라는 ‘시장 경제’ 철학이 가장 큰 이유였다.

정부 또한 그의 뜻을 받아들여 9월9일, 3년 만기 국고채가 11.6% 금리에 팔려나갔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높은 금리지만 당시는 위기 직후 살인적인 고금리가 기승을 부릴 때다. 정부로서는 성공작으로 평가할만한 성과였다. 이것이 한국 정부의 채권에 대해 처음으로 시장이 제대로 된 가격을 매긴 때다. 채권시장이 탄생한 순간이다.

제대로 된 시장을 갖게 되니 한국 정부 이름으로 내는 빚 국고채의 값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금리가 떨어졌다는 얘기다. 현재 국고채 금리는 1.77%다.

현재 국고채 발행잔액이 520조원을 넘는다고 한다. 전철환 총재가 탄생시킨 채권시장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 나라 빚의 이자부담만 매년 51조원을 줄이고 있는 것이다. 1998년 채권시장 탄생이 유전 10개에 맞먹는 국부의 창출이란 말이 헛된 말이 아니다.
 

   
▲ 2012년, 정부는 30년만기 국고채 발행하는 행사도 열었다. 1998년 외환위기 직후, 3년만기 국고채의 인수도 자신하기 힘든 정부였다. 이 때 시장발행으로 채권시장이 탄생한 이후, 국고채는 최고의 금융상품으로 떠올랐다. /사진=뉴시스

 

시장과의 소통을 중시했던 전철환 총재시절, 한은 금통위의 발표문은 단어 하나에 금리로 환산할 수 있는 정책 평가가 실려 있었다. 그가 내리는 정책진단은 조만간 한은의 정책에 반영된다는 신뢰를 시장이 존중했다.

세월이 흐르다보니 조금 이상한 얘기도 들린다.

전철환 총재가 자신의 고향 인맥만 중시했다는 것이다. 전철환 총재 시절, 특히 그의 발탁인사가 돋보이는 인물이 두 명 있다. 한 사람은 충남 출신, 또 한 사람은 경기도출신으로 그와 아무 관련이 없다. 당시 경쟁자로 평가된 사람들이 오히려 더 쟁쟁한 출신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인사로 인해 상대적 불이익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약간의 유감을 갖고 있는 사람을 나 또한 만난 적은 있다. 이런 분들 또한 직무를 맡은 동안 ‘IMF 위기’ 극복에 헌신한 사람들이다. ‘IMF 이전’ 한국사회에서 충분히 발탁되고도 남을 이력을 갖추고 있다. 왜 하필 나의 때에 이르러 예전의 기준이 무시되느냐는 아쉬움을 인지상정으로 갖는 것은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기는 한다. 그러나 이런 한 구석의 얘기가 어떤 연유로 ‘확성기 효과’를 얻었는지는 모르나 절대 공감할 수도 없으며, 기자들이 머물러야 할 정론도 아니다.

2002년 4월, 한국 금융사에 극히 이례적으로 전철환 총재가 임기를 모두 채우고 물러났다. 원래 몇 달이라도 충남대 교수의 잔여 재직기간을 채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그의 결벽증이 용납하지 않았다. 학교는 본교 교수가 국가기관장을 맡는 사실이 명예로운 일이니 교수직을 유지해주기를 바랐다고 하지만, 그는 이마저도 사양하고 한은 총재가 되면서 바로 교수직을 사퇴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가 편하게 야인으로 보내기를 허용치 않았다. 불과 몇 달 만에 공적자금 관리위원장으로 그는 정책 일선에 복귀했다. 이해가 엇갈리는 일이 산적한 공적자금이니 그의 존경받는 카리스마가 필요했다.

2004년, 허리가 불편했던 전철환 공적자금위원장이 치료를 위해 입원했다. 뜻밖에도 심장이 매우 좋지 않다는 진단이 나왔다. 심장수술을 받고 난 후, 처음의 경과는 좋아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의료진이 미리 우려했던 증상들이 나타났다. 6월18일, 전철환 전 한국은행 총재는 홀연히 이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가 그의 10주기다. 그러나 한국은행을 비롯한 그 어느 곳에서도 이렇다 할 얘기가 들린 것이 없다. 그러니 사흘 전의 11주기를 얘기하는 사람은 더욱 없다.

궁벽한 만필을 쓰는 이 사람이 일 년에 한 번 솔뫼 전철환 총재를 다시 기억하는 일을 거를 수 없는 이유다. 나는 내년에도 전철환 총재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할 것이다. 먹을 갈아 붓을 들 수 있는 한, 나는 계속 전철환 총재 이야기를 들려드릴 것이다.

딱 한 분, 이 나라에 다시 태어났으면 하는 분이 있다면 신뢰와 능력 모든 것을 종합해 전철환 총재라고 답할 것이다. 물론, 지금의 형편이 우리에게 그러한 호사가 주어진 들, 그 분에게 다시 그러한 책임을 맡기게 될 것인지라는 의문은 있다.

결론은, 솔뫼 선생 떠난 자리를 10년 넘도록 채우기는 커녕 더욱 크게 비우고 있는 현재의 답답함인 것이다.

 

 

 

장경순 기자 sixyellow@naver.com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